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느낀 감상을 적어내려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보시지 않으신 분은 이 글을 읽지 않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친절한 금자씨를 봤습니다. 한국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럽게 오늘 그 유명했던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싶었습니다.

내용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한 여자가 누명을 쓰게 한 남자에게 잔인한 복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전통적인 중국식의 복수혈전극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는 것)과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연출과 영화의 표현이 시대가 조금 달라져서 세련되게 묘사했다는 것이 겨우 차이라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장면 즈음에 나레이터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라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

잔인하게 사람을 살육하는 장면이나, 그런 연출은 저에게는 하나도 충격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공포영화등으로 저는 무척 단련이 되었기 때문일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 이젠 그런 장면 자체가 별로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눈쌀만 찌푸려집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영혼구원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금자씨가 좋다는 동의를 구해내는 그 나레이터의 음성이 나는 이 영화중에 가장 소름이 끼칩니다. 그것은 영혼구원따위는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영혼구원이 없다는 것은 용서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 물질만 존재할 뿐 그 외에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없다는 것은 파괴와 복수만이 이 세상에 남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영혼을 부정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삶의 희망보다는 절망을, 용서와 화해보다는 복수와 피를 더 나은 레벨로 보여주면서, 그것으로 사람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허무주의를 불러 올 수 있고, 삶을 비관적으로 보게 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최근에 연예인들이나 한국사람들에게 “우울증”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싶었는데, 실망감과 기도를 더 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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