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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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1월 중순즈음에 기록했던 글인데, 최근 잠시 시간이 되어 정리하여 올립니다.)

이 글은 샌디에고 한빛교회에서 한국의 사랑의 교회 전 목사님이신 옥한음 목사님께서 만드신 제자훈련교제를 가지고 제자훈련을 하는 중에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일반 성도의 수준으로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의 주제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합니다.

우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의 주체에 대해서 확연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핵심은 그 주체가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즉, 그 어떤 개인의 행위로도 구원과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 스스로가 어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서는 예정론의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너 예수 안믿으면 천국 못가” 라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의지적으로 절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게 되어야만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므로, 아주 틀린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여시고, 예수님께서 들어오시고 나서부터 시작입니다. 그 후에, 자신이 죄인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없으면, 자신이 무슨 죄인인지 하나님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처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결코 내가 믿고자 하는 열의는 0%, 즉, 하나도 없으며, 이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자랑 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누구 보다 더 나아서 받은게 아니기 때문이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인격이 낫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게 아니며, 내가 누구 보다 조금 더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며, 내가 누구 보다 조금이라도 착한점이 있기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결단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음은 이 “처음믿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처음 믿음”은 나의 행위나, 나의 의지가 전혀 없지만, 구원 이후에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의 “믿음”은 나의 행위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다시말해서, “믿음 생활 잘 하세요.”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믿음생활에 대해서 잘 하라는 말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데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나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나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땀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믿음에 따라서, 천국에서의 상급, 이 땅에서의 상급이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처음 믿음”을 “칭의”라고 하며, 구원이후의 믿음에 대해서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많은 크리스챤들이 소흘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부분 이 두 믿음에 대해서 수 없이 많이 강조하고 있지만, 어떤 크리스챤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특별하게 사명을 받은 사역자라고 한다면 다르겠지만, 일반 성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크리스챤의 축복된 삶을 그대로 방치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의 최소한의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살아 가는 믿음의 생활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듯 싶습니다. 비록 이름이 없이 사는 평신도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생활을 잘 하다가 꼬꾸라지는 크리스챤들을 많이 봅니다.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다가가는 그런 유혹에 그냥 넘어가는 것들을 종종 봅니다. 돈에 대해서, 그리고 성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신앙의 양심과 기본으로 살다가 많은 부분에서 넘어지는 사역자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사역자들의 실패를 사탄의 공격이라고 어떤 기독교인은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탄의 공격과 유혹인 것은 맞겠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늘 노력하고 하나님께 촛점을 두어야 하는 삶을 매일매일 주의깊게 살아가야 하는 연습이 부족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분들을 정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매일 매일을 믿음의 정진을 위해 연습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보지 않는 새벽에 교통신호를 무시한다던가, 영화나 드라마를 정당한 루트가 아니고 불법으로 카피를 한다던가, 한국의 직장생활에서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사가 룸싸롱에 데려갈때, 비록 와이프가 보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일을 핑계로 가는 것을 인정한다던가의 등등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한 백인 친구에게 받은 실천적 삶에 대한 귀한 교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백인은 미국인은 아니었고 캐나다인으로써 일 관계로 멕시코에 일본인 친구와 함께 출장을 간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중에, 일본인 친구 (그의 역할이 거의 영업과 비슷한 역할이었습니다.)가 멕시코로 왔으니 쉬는 김에 클럽 (멕시코에서의 클럽은 스트립쇼와 함께 잘못하면 성관계까지 갈 수 있는 곳입니다.)에 가자고 그 캐나다인과 저와 다른 미국인과 함께 꼬득였습니다. 보통 제가 알고 있는 한국사람의 특성은 출장이나 출장이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룸싸롱등을 가는 것이 비지니스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화였습니다. 아마 일본의 문화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꼭 문화가 아니더라도, 남자들이라면, 그런 문화에 길들여져 있고, 한번쯤 눈감고 갈만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인 저는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드러내지 않고 (즉 분위기 깨지 않고), 그냥 그런 곳에 가기는 하지만, 여자들과 살을 섞지만 않고 내 자신을 지키다가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캐나다인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손에 낀 반지를 그 일본인에게 똑똑히 보여 주며서, 나는 결혼 했다. 결혼의 신성한 서약이 있는데, 나는 그런 곳에 결코 갈 수 없고, 불편하다. 라고 얘기하면서 소위 말하는 분위기를 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모임을 구성하려던 그 일본인만 혼자 가고 우리 나머지는 그냥 숙소로 돌아 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 캐나다인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확인 할 수 없었지만, 크리스챤이라고 했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리고 그 친구가 준 교훈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배웠습니다.

자신에게 돌아 올 수 있는 불이익이나 손해를 계산하기에 앞서서, 바른 말을 하고, 정직한 삶의 실천이 사실은 현대의 그리스도인, 특별히 한국 크리스챤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건강함 뿐 아니라, 공동체인 교회와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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