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를 묵상하며…

히스기야를 묵상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시리아 왕인 Sennacherib은 정말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그가 보기에는 유다민족이 믿는 하나님이나, 다른 나라의 신이나 별 다를 것 없는 힘 없고, 보이지 않는 신일 뿐이었다.

그는 이집트를 비웃고, 신에 의지하는 유다민족을 비웃으며, 오히려 니네 신이 나보고 너희를 공격하라고 했다고 하면서 웃으면서 얘기한다. Hamath, Arpad에 있던 신이 뭘 그들을 도왔는지 보라고 얘기한다. Sepharvaim, Hena, Ivvash의 신들이 뭘 했는지 묻는다. 심지어 Samaria의 신은 어디서 뭘 했는지 묻는다. 모든 신을 격파한 Assyria 의 군대에 보잘 것 없는 유대나라의 신이 뭘 어떻게 하겠느냐고 웃으면서 얘기한다. 그냥 자폭하고 투항하라라고 얘기하고, 맘만 먹으면 안줌도 안되는 것들이 웃기고 있다고 비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네가 잘났길래, 뭐가 다른 신과 그렇게 다르기에, 그렇게 그 신을 믿고 있냐고 웃고 있다.

보이는 것만 본다면, 그 거대한 Assyria의 군대 장관이나 왕이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 맞는 얘기일 수도 있다. 모든 나라들이 Assyria의 크고 강한 군대 앞에서 다 쓰러져 갔다. 유다의 땅은 작고, 군대도 볼품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을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지금의 세상도 다름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리숙해보이고, 순진하게 보인다. 세상은 교활한 정치가들과 힘 있고, 강한 자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약한 크리스챤들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옳은 것을 외치는 것이 우스워 보인다.

세상뿐일까, 교회도 그렇다. 옳은 소리를 내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뭘 모르고 얘기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세상 모르는 순박한 소리일 뿐이다.

그 사람이 판단을 잘못하여, 아, 그래, 내가 멍청했어. 이런걸 의지하다니… 세상은 강한 자에 의해 돌아가는 거야..하면서, 세상을 의지 한다면, 그가 믿고 있다는 하나님은 그를 버릴 것이다. 그는 그가 비웃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망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를 내버릴실지도 모른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았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대로 따른다.

오늘 본문인 2 Kings 19:29-37은 그 결론을 보여준다. Assyria는 대패했고, 활 하나도 유다민족게 쏘지 못하고 본국으로 되돌아 갔으며, 하나님을 자신 만만하게 모욕했던 Sennacherib은 그 두 아들에게 칼에 맞아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무조건 보호하신다는 말씀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던지, 내치시던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데로 “행동”을 할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 같다.

과감한 개혁

오늘의 QT는 열왕기하 18:1-12절이다.

유다왕 히스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쁜 일들을 하였다. 여러 우상들을 제하였고, 모세의 놋뱀에 절을 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없애기 위해 그 놋뱀을 부수었다.

모세의 놋뱀을 부수었다는 장면이 오늘은 나의 눈을 사로 잡았다. 이것은 마치, 현대시대에 십자가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만일에 사람들이 십자가에 놓고 분향하고 기도하였다면, 그 십자가를 부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모세의 놋뱀이 우상이 되는 것 처럼, 십자가나 성경책이 우상화가 되는 우를 범할수도 있다.

예전에 어떤 선교사가 성경책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말씀을 전하면서, 무슬림들이 코란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도 성경책을 소중하게 모셔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때도, 그 말이 가질수 있는 우상화에 대해서 나는 염려를 했었다. 그 선교사는 아이패드나 아이폰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성경책으로 성경을 읽기를 강조했는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설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히스기야는 모세의 놋뱀도 부셨듯이, 우리가 보이는 십자가나 성경책을 하나님보다 우선시 하고 있다면, 그것을 부술수도 있어야 한다. 신앙의 본질에 더 다가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멋진 다윗

사무엘하 15:24-26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 Samuel 15:24-26

24 Zadok and all the Levites also came along, carrying the Ark of the Covenant of God. They set down the Ark of God, and Abiathar offered sacrifices until everyone had passed out of the city. 25 Then the king instructed Zadok to take the Ark of God back into the city. “If the Lord sees fit,” David said, “he will bring me back to see the Ark and the Tabernacle again. 26 But if he is through with me, then let him do what seems best to him.”

전기철 목사님 성경 강의를 듣다가 위의 말씀을 보고 멋진 다윗의 모습이 있어 메모한다.

배경은 이렇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순간에 도망을 가는 비참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때, 사독이 여호와의 궤를 들고 다윗과 함께 가려고 하는데, 다윗은 이를 만류하고, 다시 여호와의 궤를 되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를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면, 이 궤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나는 다시 돌아 올 것이고, 그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가장 선하게 생각하시는데로 그의 뜻 가운데 행하게 하라.”

멋진 모습이 이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가 마음데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뜻데로 되지 않고,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일이 되던지 그러하지 않던지, 그분의 주권에 자기의 삶 자체를 맡긴다. 사울이 여호와의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고 나가다가 전쟁에서 패하고 죽임까지 당했던것과 상당히 비교가 된다.

세월호 그리고 목사님들

 

목사들의 참회록인가?

교회들에게 따끔하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하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교회 주교로 알려져 있고, 심지어 바울을 지도하고, 바울은 야고보를  매우 존경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고린도전서 15:3-8, 야고보는 누구인가? ) 그는 야고보서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 야고보서 1:27 ) 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도 행동하는 분이셨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유대교의 전통을 매우 중요시 여기던, 사회 지도자층이자, 기득권자들의 부정과 위선적인 모습을 강하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오직 그는 바리새인들 혹은 사두개파들의 질시와 멸시의 대상인 세리, 창녀,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하셨다.

그것을 알고 계신 목사님들이, 그것도 현 시대에서 많은 부분에 있어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하는 분들이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부정과 위선적인 정치인들에 맞서서 당당하게 옳은 얘기를 용기있게 하지 못하는 분이라는 사실은 상당한 실망감을 준다.

그들의 말은 정말 청산유수와 같이 아름답고, 그 말씀가운데에 은혜를 많이 받는다. 은혜 받는 사람에게 더 큰 은혜가 있을 지어다. ( 아멘 )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은 입술로만 아름다운 말만 할 뿐, 본인들이 행동하는데에는 무척이나 주저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은혜로운 말씀들이 힘을 잃게 되는 것 같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직접 비난하시고 비판하신 그 말만 번지르르한 바리새인과 동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월호를 설교에 언급하는 것이 이제는 정치적으로, 교회내의 보수파 장로나 보수층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고, 많은 목사들이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금식보다 교회의 분열이나 교회 어른들에게 밉상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한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옳을까?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아모스 5:7-24 )

세월호의 참사와 그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내가 무언가 많이 할 수 없는 것이 참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미국에서, 직장속에 파묻혀, 매일 매일을 생계에 허덕이는 게으름으로, 나는 세월호에 관련되어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시간 하나 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인가 라는 질문에, 나 자신도 사실은 너무나 부끄럽다.

행동하자. 그리고, 실천하자. 그리고, 두려워 말자.